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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말하는간호사

간호사 집단에서 반항하기

어제 3년 일하고 퇴사한 나의 첫 프리셉티 선생님과 밥을 먹었다.

앞으로 여행도 많이 가고 하고 싶은 거 많이 하라고 이야기를 했지만 그 선생은 말했다.

예전에는 정말 여행도 많이 가고 하고 싶은 것도 많고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나를 잃어버린 것 같다고. 이제 난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열정이 사라졌다고.

 

 

너무 안쓰럽고 마음이 아팠다

그리곤 오랜 시간 생각했다.

간호사 특유의 조직문화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되었다는 걸 대한민국의 모든 간호사들이 알고 있으면서도 몇 십 년째 유지될 수 밖에 없는 이유.

그걸 알고 있으면서도 간호대학의 경쟁률이 나날이 치솟는 이유. 한 해 입사하는 신규 간호사의 반절이 일 년 안에 퇴사하는 걸 알면서도 또 그만큼의 신규 간호사들이 대학병원에 입사하기 위해 대기 줄에 서있는 아이러니한 상황.

왜 바뀌지 않는 건지. 왜 바꿀 수 없는 건지. 그리고 어떻게 해야 조금이라도 바꿔나갈 수 있는 것인지

 

 

"태움의 원인은 인력과 시스템에 있다.” 라는 프레임은 10년 전만 해도 없었다.

태움을 당연하게 생각해 왔고, 필요악이라고 생각했다. 심지어 당하는 사람도 그랬다.

태움의 원인은 인력에 있으며 인력을 투입해야 태움이 없어진다는 연결고리는 노동조합에서 인력을 투입하기 위해 만들어낸 연결 고리이다. 오랜 시간 싸우며 전달했던 목소리가 이제야 사람들의 인식에 자리 잡은 것이다. 그건 당연히 맞는 말이다.

사람의 의지력은 정해져 있다. 업무를 하면서 인간관계에까지 인내를 베풀기에는 한 명의 간호사가 감당해야 하는 업무의 양이 비인간적으로 과도하다는 것은 이미 여러 연구로 증명이 되었다.

   


그렇지만 인력과 시스템의 이야기는 잠시 두고, 조직의 분위기와 문화는 또 다른 이야기라 생각한다. 인력이 투입되면 시스템이 개선되면 정말 모든 게 해결이 될까? 조금 더 나아질 수는 있겠지만, 태움이라는 말이 이 세상에 사라지는 날이 올까?

업무의 강도가 낮은 부서에도 태움이 있다. 업무의 강도가 높아도 분위기가 좋은 부서가 있다. 이건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태움은 대물림이다. 가해를 하는 사람들은 모른다. 내가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지 무슨 행동을 하고 있는지, 내가 하는 말과 행동이 피해자에게 어떠한 상처를 주고 있는지, 어떤 극단적인 행동까지 만들어낼 수 있는지.

   


그렇지만 태움의 대물림을 끊어줄 사람들이 없다. 이건 아닌 것 같은데요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간호사 집단에는 유난히 없다.





나이가 들고 사회적 지위가 올라가면서 행동을 제지하는 사람들이 줄어들자 자신이 옳다는 용기가 생긴 것이다.

그러면서 무례함이 걷잡을 수 없이 부풀어 올랐다.”

- 책, [무례한 사람에게 웃으며 대처하는 법] 중에서 -


 

 

미친 듯이 달리는 기차를 막는 것이 자살행위라고 생각되어서인지 어느 누구도 시도하지 않는다아무도 제재를 가하지 않아왔아 걷잡을 수 없게 각잡혀 버린 위계질서. 이게 바로 간호사 특유의 문화이다

그리곤 끊임없이 참고 버텨라라는 말만 되풀이한다. 신규 간호사를 위한 책들이 정말 많이 발간되고 있지만 참고 버티라는 말이 나오지 않은 책은 없다. 참고 버티는 것이 자기의 자존감을 열심히 깎아 버리는 것인지도 모른 채. 그렇게 참고 버티면 3년 뒤 남아있는 건 진짜 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되어 버린다는 것도 모른 채.

   


병원에서 살아남는 게 성공한 것인가? 그게 정말 병원에 오기 전에 꾸었던 꿈인가?

잘 돌아가는 시계의 고작 태엽 하나로 자리 잡아버리는 게 인생의 목표였단 말인가?

   


고개를 숙이고 어깨를 잔뜩 움츠린 채 출근인사를 건네는 신규 선생님들을 보면 마음이 아프다. 본인이 먼저 지레 움츠러들지 않아도 되는데. 신규라는 이름표의 무게를 본인이 먼저 무겁게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데.

   


불과 몇 년 전 아니 몇 달 전만 해도 자신감으로 어깨를 당당히 펴고 고개를 들고 면접장에 들어섰을 것이며 기쁜 마음으로 합격 통보를 받고 신규 교육을 받기 시작했을 것이다. 입사 때 가지고 있었던 그 당당함을 절대 버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아니 버리지 않아도 된다. 버리지 않아야 앞으로 간호사 직종의 조직문화가 바뀔 수 있다. 몇 년 뒤 자신을 바라보면서 움츠려든 내가 아닌 더 상장한 내가 보일 것이다.

   


유난히 수동적인 성격을 가진 사람들이 간호사를 선택하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요즘 더 많이 하면서, 신규 선생님에게 마음 다지는 법. 목소리 키우는 법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해주고 있다. 적어도 누군가는 신규 선생님에게 목소리 내는 것을 무서워하지 말라고 말해주는 선배 간호사 한명쯤은 있어야겠다고 생각했다.

 

" 누구든 의사를 명확히 표현하는 것이 장려될 때, 수평적이고 자유로운 문화가 우리의 유산으로 남겨질 것이다.

참는 것이 미덕인 시대는 끝났다.”

- 책, [무례한 사람에게 웃으며 대처하는 법] 중에서 -